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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역사-서양인이 본 적후 항일전쟁

입력:2015年08月17日 10:36 | '부흥논단'(중문) 진입 | 기사출처:CCTV.com

 

[CCTV.com한국어방송]오늘은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적진 후방에서의 항일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노먼 베쑨은 중국인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마이클 린드세이는 베쑨의 친구입니다. 1937년 12월 밴쿠버에서 함께 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왔습니다.

그는 중국의 적진 후방에서의 항일전쟁을 기록하고 서방에 알림으로써 세계에 항일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클 린드세이가 저술한 '화베이 유격전 보고서'는 미국 제2국가기록보관소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26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의 머리말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있습니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실력 있는 영국 젊은이입니다. 이 보고서는 화베이 유격 근거지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관찰 보고서입니다."  마이클 린드세이에 대한 미국 중앙 정보국의 평언입니다.

 

<본문>

 

마이클 린드세이는 보고서에 무장유격대가 항일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은 실제 상황을 모르고 한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무장유격대는 탄약이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공격을 펼칠 수 없지만 작은 규모의 전투는 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일본군의 군사 거점 습격, 도로 봉쇄, 전선 절단 등 1942년 상반기에만 한 개 현의 민병들이 400여 차례 전투를 벌렸습니다.

팔로군의 한 지휘관은 마이클 린드세이에게 너무 바빠서 이 잡을 시간조차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 지중군구의 사령원이었던 뤼정차오 사령원은 마이클 린드세이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습니다.

뤼정차오 사령원의 딸은 얼마 전 미국 제2국가기록보관소에서 역사자료를 열람하던 중 대부분 자료가 마이클 린드세이가 저술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자막)뤼퉁린/건국 상장 뤼정차오의 딸

마이클 린드세이가 자주 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중국공산당의 무기가 좀 더 좋았더라면

일본을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린드세이는, 좋은 무기가 없었지만 일본군의 무기를 빼앗아 탄알 껍데기에 화약을 넣어 재활용했고 산간지역에 무기 공장을 설립해 구식 수류탄을 만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끊임없는 돌격전을 통해 적지 않은 일본군을 섬멸하거나 포획했습니다. 이런 유격전은 화북전쟁터에서 적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올해 96세의 후빙 노인은 그때 마이클 린드세이와 아는 사이였으며 그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 후빙 노인이 기억하는 린드세이는 아주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린드세이는 진차지 구역 주변에서 빼앗은 일본군의 차량으로 수백 대의 무선통신기를 재조립했으며 무선통신기 조종인원들을 양성했습니다.

 

(자막)후빙/진차지 4분구 정치부 신문촬영조 조장

진차지 지역을 떠난 뒤

옌안으로 갔습니다

그는 대형 송신기를 제조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대형 송신기는 여러 근거지를 서로 연계해줄 뿐 아니라

국외로도 신화사의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외국인들도 공산당이 적진 후방에서 펼치는

항일전쟁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니 영향력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앵커>

 

항일전쟁 초기 마이클 린드세이처럼 적진의 후방 근거지에서 활약했던 서방인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1937년부터 1938년사이, 서방의 일부 촬영가와 여행가, 기자들이 잇따라 옌안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항일전쟁을 견지하는 중국공산당의 실상을 기록했습니다.

1944년 7월 중국-미얀마-인도 전역의 조지프 스틸웰 미국 군 총사령관이 파견한 미군 답사단이 옌안에 주둔했습니다. 그때 답사단 회원들이 옌안에서 활동하던 장면을 담은 진귀한 영상자료가 미국 제2국가기록보관소에 보존돼 있습니다.

<본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답사단의 9명 회원이 옌안에 도착했습니다. 답사단 회원 중에는 외교인사, 정보요원과 중국통 인사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자막)뤼퉁린/건국 상장 뤼정차오의 딸

 

답사단이 옌안에 간 관건적 이유는

유격대가 과연 기자나

다른 인사들이 말한 것처럼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미군이 파견한 답사단은 옌안에서 3개월간 주둔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3년이나 옌안에 머물렀습니다. 한편 추가로 300여 명의 미군 답사단이 옌안을 다녀갔습니다.

옌안을 다녀가기 전 그들은 중국공산당의 항일전쟁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장 답사를 거쳐 원래의 관점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합니다.

세 번째 답사단 단장이었던 피터 킹은 옌안에 오기 전 공산당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4개 월간 옌안을 답사한 뒤 피터 킹은 중국공산당의 항일 결심과 능력을 확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밖에 피터 킹은 진차지 지휘관들이 하는 모든 일에 찬성한다고 표했으며 칭찬을 했습니다.

답사단은 3년간 옌안에 주둔하며 미국 정부에 대량의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답사단 회원들은 보고서에 "유격대는 무기가 낙후하고 제한되어 있지만 현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자막 삭제 4:58)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과 접촉했던 서방인사와 기자 그리고 미군 답사단 회원들은 대부분이 중국공산당의 33제 정권을 거론합니다. 이른바 33제는 항일민주정권인원 배치에서 중국공산당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좌파와 진보인사가 3분의 1을 차지하며 중립인사와 기타 신분의 인사가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이클 린드세이의 말을 인용하면, 적진 후방 항일근거지에서 역량 차이가 현저한 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려면 정밀하게 설계된 33제 조직 체계는 필수적 조건이었습니다.

 

(자막) (자막)뤼퉁린/건국 상장 뤼정차오의 딸

그들은 당시 33제야말로 민주적인 제도로

사람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이클 린드세이를 포함한 서방인사들과 미군 시찰단이 적진 후방 항일근거지에서 겪은 경력은 미국과 동맹국이 전략적 정책을 내오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정부가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설립할 것을 최초로 호소했던 것도 역시 옌안을 방문한 적 있는 중국통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적진 후방에서의 항일전쟁을 세상에 알렸던 것입니다. (편집:김선화, 이단, 임영빈)

잊을 수 없는 역사-서양인이 본 적후 항일전쟁 오늘은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적진 후방에서의 항일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노먼 베쑨은 중국인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난 마이클 린드세이는 베쑨의 친구입니다. 1937년 12월 밴쿠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