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림의 노래 (2) 녹색이 넘치는 세상

입력:2013년10월17일 15:20 | '부흥논단'(중문) 진입 | 기사출처:CC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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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가 자연에 대한 보상은 새로운 삼림을 건설하는 것이다. 수백년, 수천년후 새로운 원시삼림은 우리 인류가 건조한 것이다.-PD수기

    이는 하나의 봄날의 이야기이다.

    1982년3월2일은 중국의 첫 식목일이다. 이날 77세의 등소평(鄧小平)동지는 온가족을 데리고 베이징 옥천산에 와 흥미진진하게 이곳에 전민의무식목운동의 첫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이로부터 중화 대지의 식목조림은 새로운 봄날을 맞이했다. 이 봄날을 산천대지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기다렸다. 이 봄날을 역사는 하나 또 하나의 천년을 기대했다. 

    우리들로 하여금 중국의 대삼림으로 돌아오게 했고 부단히 잃어가던 임해의 파도소리를 추적하게 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삼림이 무성했고 녹색파도가 넘실거렸으며 일망무제했다. 전문가의 추산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때, 중국의 삼림율은 64%에나 달했다. 

    더욱이 ‘동남반벽’(東南半壁)의 구릉지대는 삼림율이 약 80-90%에 달했다. 

    황제 헌원으로부터 하나라에 이르는 수백년간 화하선민(華夏先民)들은 동굴에서 나와 찬란한 채색자기문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삼림은 이로 인해 파괴당했다. 하나라가 건립될때, 삼림율은 약60%로 하락했다. 

    당시의 삼림축소는 상대적으로 지금의 산시(陝西), 산시(山西), 허베이, 허난, 산둥, 안후이 등지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인구가 가장 많아야 겨우 100만명가량에 달해 삼림벌채정도도 상대적으로 경했다.     

    하나라 건립부터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할때 까지 중국인구는 140만명가량으로 부터 2000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정교로운 청동기 뒤에는 한대 또 한대의 땔나무의 연소로 이루어졌다. 연소의 뒤에는 잔혹하고 빈번한 점거전쟁이었다. 이런 인류의 대규모활동이 삼림에 대한 파괴는 심각했다. 

    춘추시기에 발생한 유명한 성복전쟁(城濮之戰)을 보기로 하자.

    기원전 632년 4월4일 이른 새벽, 중원대지의 성복에는 전장에 하늘에 자욱한 큰 바람이 불어 사방이 온통 캄캄했다.  

    갑자기 강대한 초나라 군대는 고막이 터질것 같은 함성을 들었다. 진나라군대의 전차가 우르르 달려오고 하늘을 덮는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새까맣게 모여들었다.

    초나라 대장 성덕신은 이 진영을 보고나서 진(晉)나라 군대의 병력이 대폭 증가되어 매복당한것으로 간주했다.  

    초나라군대는  즉시 질서가 흐트러졌다. 결과 성복에서 참패했다. 

    열세에 처한 진나라군대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군력이 대폭 증가했을까?

    원래 진나라군대는 밤새도록 성복주변의 크고 작은 나무를 베어냈다. 전차는 이 수많은 우는 나뭇가지를 끌고 하늘을 덮는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적군을 미혹시켰다. 

    진나라군대는 대승했다. 그러나 중원대지의 이 성복삼림은 하룻밤 사이에 도마위의 고기가 되어버렸다. 언제 어느세월에 이곳에 새싹이 자라날까?

    이 1800여년간, 중국의 삼림율은 약 60%에서 46%로 하락했다.   

    진(秦)나라,한(漢)나라,위(魏)나라,진(晉)나라,남북조(南北朝)에서 수당(隋唐)나라까지 1128년 걸렸다. 이시기, 중국의 인구는 2000만명에서 8300만명으로 증가되었다. 

    우리는 이런 진나라 벽돌(秦磚), 한나라 기와(漢瓦), 당삼채(唐三彩)의 정교한 기예에 감탄하는 동시에 멀리서 들려오는 벌목소리도 듣는 것만 같다. 

    우리는 장안에 건조한 이런 세계적으로 가장 웅대한 궁전을 경탄할때 거목이 와르르 넘어지는 것도 보는 것만 같다. 

    이 기간, 중국의 삼림율은 46%에서 33%로 하락했다. 

    5대(五代), 송나라(宋),요나라(遼), 금나라(金), 하나라(夏), 원나라(元),명나라(明)에서 청나라(清)에 이르는 근 천년사이에 중국인구는 3000만명에서 청나라 도광20년의 4억1천281만명으로 급증했다. 

    인구의 폭증은 곧 삼림의 감퇴였다. 삼림의 지탱이 없는 중원지역의 사람들은 부득불 중화문명의 발원지-황허(黃河)를 떠나 ‘양안에 원숭이 울음소리가 그칠줄 모르는 곳’인 창장(長江양자강)유역으로 이주했다. 

    청나라 전기에 이르러 창장 중류지역에 대량의 ‘천막민’(棚民)들이 출현해 숲속에 들어가 산비탈을 개간하여 경작했다.  

    삼림이 적은 나날은 하나의 어떤 나날일까?    

    우리는 작은 예에서 관찰해보기로 하자!   

    송나라의 건축수첩 ‘영조법식’(營造法式)을 세심하게 열독한후 우리는 당나라 불광사의 대량의 목재사용량과 비교할때 송나라의 건축은 목재사용량에서 많이 감축되었다는 것을 발견할수 있었다. 이전에 지면에 사용하던 벽돌이 조용히 벽의 목재를 담당한 것이다. 

    원나라에 이르러 아예 들보를 줄이고 기둥을 바꾸었다. 목재사용량이 극히 적은 ‘감주조’(減柱造)와 ‘이주법’(移柱法)을 발명했다. 

    명청시기, 황제가 고궁을 수축할때 사용하는 목재를 머나먼 서남변강지역에 가 채벌해야 했다.   

    이 1천년간, 중국의 삼림율은 33%에서 17%로 하락했다. 

    중화대지의 삼림은 신주고대륙이 화하종족에 대한 푸짐한 선물이었다.  삼림은 화하종족에 헤아릴 수 없는 기여를 했다. 그러나 삼림은 이를 위해 거대한 희생을 했다.

    수천년의 민간땔나무벌목, 국가벌채, 삼림훼손경작, 빈번한전쟁을 거쳐 1949년, 전국의 삼림율은 겨우 8.6%에 달했다.    

    새중국창립후, 공업체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아 근본적으로 자아축적능력이 없었다. 중국공업화의 원시자본축적은 주로 농업과 원료형산업(原料型產業)에 의지해야 했다. 임업은 자기의 천연적인 원료성으로 국민경제의 지주산업과 주요성장점으로 되었다. 당시의 국가경제건설사업에서 목재와 강재,시멘트는 3대 기초원자재로 불렸다.  당시 국민경제 각 부문 서열에서 임업은 앞 5위에 들었다. 

    공화국창립후의 40년간, 채벌은 줄곧 임업부문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20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삼림채벌량이 점차 감소되는 추세를 보였다. 반세기동안, 새중국 경제건설에 누적 소모한 삼림자원은 86억입방미터에 달해 1949년 당시의 전국의 모든 삼림을 모두 한번씩 채벌한 것과 같았다. 

    50년간, 전국적으로 누적 생산한 성형목재는 50억입방미터, 죽재는 73억대, 인공판은 9223만입방미터, 거재(鋸材)는 6억입방미터, 송진은 1200만톤에 달했다. 

    대량의 삼림사용은 마땅히 즉시적으로 삼림을 조성해야 했다. 

    새중국의 개척자들은 폐허에서 탄생한 새중국은 반드시 자연을 보호하고 식목조림해야만 부강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석하게 보아냈다.   

    모택동은 1955년에 사람들에게 “남북각지에 몇년안에 녹화를 볼수 있으면 좋겠다. 이는 농업, 공업, 각 방면에 대해 모두 유리한 것이다.”라고 경계했다. 

    모택동은 더 나아가서 “임업, 조림이 우리 장래의 근본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택동의 ‘조국녹화’, ‘대지원림화실시’의 호소아래 중국은 1956년에 첫번째 ‘12년녹화운동’ 을 시작했다.  

    대량벌목해 건설하던데로부터 나무를 심어 생태를 건설할 것을 강력하게 제창했다. 이런 전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영순, 동북임업국 1등노동모범, 전국노동모범은 성공적으로 이 간거한 역할전환을 완수했다.

    1959년,전국군영회에서 주은래총리는 마영순을 접견할때 기대에 차 그의 손을 잡고 “당신들 임업노동자들은 목재를 생산해 국가건설을 지원해야 할뿐만아니라 나무를 많이 심어 녹화를 잘 틀어쥐고 청산이 항상 푸르게 하여 영원히 이용할수 있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은래의 말은 비록 간결했지만 새중국 제1대지도자의 장구한 희망을 표달했다.     

    그때로 부터 벌목으로 유명하던 마영순은 장장 30여년에 달하는 식목조림사업을 시작했다.  

    1998년여름,당시 국무원총리를 담당하던 주용기(朱鎔基)동지가 노임업노동자 마영순에게 “당신은 한평생 두가지 좋은일을 했습니다.국가건설에 목재를 수요할때 당신은 벌목노동모범이 되었고 국가에서 생태환경을 보호하려 할때 당신은 식목노동모범이 되었습니다.우리 모두 당신을 따라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마영순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심은 나무는 이무 숲을 이루었다. 매양 미풍이 사방에서 일때 숲속의 나뭇잎은 싸싸싸 소리를 낸다. 마치 식목인들을 위해 감회를 털어놓고 노래를 부르는것 같았다.  

    실제로 마영순은 고독하지 않았다. 그가 온 힘을 기울여 조림을 할때 내몽골에 위치한 훈산다크사토(浑善达克沙地)변두리에도 한무리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는 격정이 타오르는 세월이다. 지난세기 50년대, 허베이성의 한무리의 젊은 개척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하늘을 덮는 황사를 무릅쓰고 싸이한파(塞罕壩)라고 부르는 곳으로 왔다.  

    황량한 토지에 그들은 한뙈기 또 한뙈기의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작은 나무는 쉽사리 토사에 묻혔다.

    험한 날씨는 이 젊은이들을 또 쫓아 보냈다. 

    설마 사람들은 하늘앞에 어쩔 방법이 없단 말인가? 어떤 사람은 이를 믿지 않았다. 

    1961년10월의 어느날, 임업부 전임 부부장, 당시 임업부 국영임장관리국 부국장을 담당하던 류곤(劉琨)동지는 조용히 싸이한파에 왔다. 그의 두 눈은 도처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다. 끝내 량빙타이(亮兵臺)라고 부르는 곳에서 그는 벌목한 낙엽송 나무뿌리를 발견했다. 훙쑹와(紅松洼)에서 또 왕성하게 생장하고 있는 낙엽송을 발견했다. 

    젊은 개척자들이 또 돌아왔다. 이때로부터 싸이한파는 낙엽송재생의 천당으로 되었다. 40여년간, 그들은 모래밭에 끊임없이 나무를 심고 또 심었다. 

    끝내 어느날, 그들이 머리를 들고 시력이 미치는 곳까지 멀리 바라봤을때 그들은 하나의 크나큰 삼림을 보았다. 110만무!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는 중국최대의 인공삼림이라고 알려주었다. 

    행복이 그들의 얼굴에 넘실거렸다. 시인이 왔다. 그들은 싸이한파의 연산을 내려다보면서 영감이 조수처럼 솟아 올랐다. 시인은 저도 몰래 음송했다. 싸이한파, 당신은 강의 원천, 꽃의 세계, 숲의 바다, 진기한 조수의 천당이여라. 

    그러나 정치운동의 충격으로 이 식목조림운동은 보편적으로 보급되지 못하고 견지하지 못했다.  

    수천년간 대규모로 삼림을 개발, 이용해 중국의 삼림자원은 엄중히 결핍했다. 중국 국토면적은 세계 총면적의 7%에 달하지만 중국의 임지면적은 겨우 세계 임지총면적의 4%에 달해 세계 111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광대한 토지에 임목이 희소하여 이미 중국의 생태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20세기 80-90년대, 인구가 날로 늘어남에 따라 환경부하가 엄중하게 초과하여 생태안전문제가 날로 돌출하게 나타났다. 장마와 가뭄재해의 악화는 부단히 사람들에게 생태위기를 경고했다.    

    1981년 여름철, 쓰촨에서 발생한 특대수재는 등소평동지의     심사숙고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최근의 홍수재해는 임업에 관련된다. 목재의 과도한 채벌에 관련된다. 보건대 중국의 임업을 춰세워야 한다.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창도하에 1981년12월13일, 5기전국인대 4차회의에서는 ‘전민의무식목운동을 전개할데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식목조림은 이때로부터 중국의 매개 공민의 의무와 책임으로 되었다.  중국의 임업건설사업도 이때로 부터 번영발전하는 새시기에 진입했다. 

    등소평이 말한 “식목조림, 조국녹화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후세를 행복하게 하는 위대한 사업이다. 20년을 견지해야 하고 100년을 견지해야 하며 천년을 견지해야 한다. 대대로 영원히 해나가야 한다. ”는 것과 같다.  

    강택민(江澤民)동지는 일관되게 중국의 삼림보호와 생태건설사업을 중시했다. 그는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했을뿐만아니라 매년 자기가 앞장서 식목조림을 했다. 게다가 ‘아름다운산천을 재건하자’라는 웅대한 푸른 설계도를 제출했다.   

    세기가 바뀐 이래, 중국정부는 제때에 천연림자원보호프로젝트, 퇴경환림(退耕還林)프로젝트, 경진풍사원천종합정비(京津風沙源綜合治理)프로젝트, 3북및 장강유역등 중점 방호림체계건설프로젝트, 야생동식물보호및 자연보호구건설프로젝트, 중점지역쾌속생장풍작형목재기지(速生豐産用材)건설프로젝트 등 6대임업중점공정을 가동했다. 

    중국의 삼림을 말할때 사람들의 시선은 자기도 몰래 우리 민족의 발원지인 창장, 황허 유역에 모인다.   

    매우 긴 시간동안, 점차 흐려지는 강물에 사람들은 자기도 몰래 깊은 우려속에 잠겼다.

    언제부터인가 강 상류의 천연림은 나날이 위축되었다. 1957년 조사통계에 따르면 창장유역의 삼림율은 22%에 달했다. 30년의 농경개간, 상업채벌을 거쳐 20세기 90년대 말, 이곳의 삼림율은 10%로 하락했다. 

    1998년,중국의 천연림보호프로젝트가 정식 가동되었다.16억무의 수시로 벌목될 수 있었던 천연림이 국가보호대상으로 되었다. 현재 세계적으로 최대규모의 이 천연림자원보호프로젝트는 창장상류와 황허 중상류지역에 한창 진행되던 천연림채벌활동을 전면 중단시켰다.동북, 내몽골 등 중점국유임구 목재생산량도 동시에 대폭 감소되었다.    

    창장조림국은 10년전에 창장수운국이라고 불렀다. 주요사업은 창장양안에서 채벌한 목재를 수로를 통해 운반하는 것이었다. 20세기 50-60년대에 이국은 ‘채벌대회전’의 중요참여자였다.   

    지금까지 여전히 야룽장(雅礱江)에 남아있는 수로로 운반하지 못한 대량의 원목은 목격자들로 하여금 창장상류의 원시삼림에 대한 대량의 채벌정경을 상상할수 있게 만든다.  

    1998년 ‘천연림보호프로젝트’가 실시되기전야 쓰촨성에서는 우선적으로 천연림의 상업채벌을 전면 중단시켰다. 이어서 윈난(雲南)의 진사장(金沙江),퉁텐허(通天河)연안에서도 엄명을 내려 채벌을 중단시켰으며 꾸이저우(貴州), 충칭 등 관련지역에서도 채벌을 중단시켰다. 

    창장수운국은 이때 조림국으로 변했다. 벌목공들이 식목노동자 혹은 호림원으로 변했으며 나무적치장이 묘포로 변했다.이전의 채벌구에서 창장조림국은 천연림보호구의 조림공사를 도급맡았다.   

    조림인들은 거의 나무를 곡식처럼 심는 농민들이었다. 나무묘목을 짊어지고 비탈을 오르고 산을 넘고 영을 넘었으며 뙤약볕에 쪼이고 모기나 벌레에 물리는 것은 식목노동의 기본내용이었다. 

    견고한 돌산에 여린 묘목들이 자리를 잡자면 오직 조림노동자들의 피땀으로 관개하는데 의지해야 했다. 

    진사장의 건조한 하곡지대에 조림을 하자면 쾌속녹화를 모색해야 했는데 이상적인 수종을 찾기어려웠다. 창장조림국은 대학교 및 과학연구소와 합작해 인도나무를 도입했는데 신속하게 뚜렷한 효과를 거두었다. 

    간쑤(甘肅)성 쇼룽산(小隴山)임업실험국은 천연림보호프로젝트의 순조로운 실시를 담보하기 위해 관념을 전변하고 메커니즘을 전환했으며 삼림관리보호방식을 적극 개혁했다. 관리보호도급책임제를 전면 추진해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삼림자원관리보호와 재배에 활력을 주입시켰다. 이로 인하여 임업인의 생계도 충족시켰다.

    이와 동시에 쇼룽산임업국에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산업구조를 조절하고 최적화했다. 임구의 우세를 발휘하고 삼림의 자원을 이용해  꽃사슴, 산돼지 등 양식장을 운영함으로써 소득을 증가시키고 노동자를 분류하였으며 임구사회질서를 안정시켰다. 또한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위해  현실에 존재하던 장애를 제거했다.  

    우리가 천연림보호프로젝트에 갈채를 보낼때 하나의 무정한 현실도 중국인들의 마음을 두드렸다.장기적인 개간과 남벌 그리고 과도한 개황으로 중국의 대량의 토지가 발가벗어 수토유실이 심각했다. 

    퇴경환림프로젝트는 바로 중국정부가 수토유실이 날로 심각해지는 현실에서 취한 하나의 중대한 전략결책이었다. 이는 억만농민의 직접적인 이익에 혜택이 미치는 프로젝트로 중서부의 모든 성과 부분적인 동부지역을 포함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25도 산비탈이상의 농토는 경작을 포기하고 나무심기에 적합한 곳에는 나무를 심고 풀심기에 적합한 곳에서는 풀을 심게 했다. 수원을 축적해 수토를 유지했다. 

    농가에서 1무의 산전에 경작을 중지하면 국가에서 일정한 식량보조금을 지급하였는데 이런 보조금정책은 8년간 지속되었다. 

    산시성 칭젠현(陝西省清澗縣)의 농민 장수분(張秀芬)일가는 세대로 선조가 남긴 동굴집에 거주했다. 현지의 생태환경이 열악해 알곡생산량이 매우 낮았고 또한 기타 경제원천이 없어 줄곧 고생스럽게 생계를 이어왔다.

    1999년, 장수분은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맞이했다. 국가에서 퇴경환림프로젝트를 실시해 그와 많은 마을사람들은 희망가득히 퇴경환림의 붐에 투신했다. 

    수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치고 또한 국가의 정책적인 지지에 힘얻어 장수분은 마침내 풍작의 희열을 맞이했다. 그의 가정에서 도급한 80무과수원에 풍성한 과일이 달렸으며 게다가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이외에 그는 또 삼림의 청초를 이용해 40여마리 양과 두마리 소를 길러 파천황으로 다각경영을 했다.현재, 식구들이 매일 밀가루를 먹을수 있을뿐만아니라 게다가 넓은 큰집에서 거주하게 되었으며 1년에 또 2만원의 소득을 올려 생활이 점점 피어나고 있다. 

    7년의 시간이 흘렀다. 황토고원의 수많은 장수분이 이곳의 산비탈과 구릉에 녹색을 옷을 단장시켰다. 계곡지역에도 점차 나무와 풀이 이어진 녹색장벽을 형성해 하나하나의 안거낙업의 고향을 수호하고 있다.  

    말할나위없이 서북의 황토고원 나아가 중국북방의 대사막에 단지 농민들의 소소한 퇴경환림과 환초에 의지해서만은 안된다. 반드시 더욱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대규모의 식목조림과 풀심기 프로젝트를 실시해야 된다. 

    이로부터, 3북방호림프로젝트가 따라서 생겨났다. 

    실제로, 3북방호림프로젝트는 6대임업프로젝트에서 가장 일찍 가동, 실시된 프로젝트이다.

    1978년, 하나의 공전의 구상이, 한차례 인류행동의 장거가 이 해에 시작되었다. 

    3북방호림은 우리나라의 동북서부, 화북북부와 서북대부분 지역을 포함했다. 동서길이가 4480킬로미터에 달하고 남북너비가 560-1460킬로미터에 달해 중국의 8대사막, 10대사토와 망망한 고비사막을 포괄해 총면적이 406.9만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3북방호림프로젝트는 1978년부터 시작해 2050년까지 지속된다. 3개 단계, 8기 공사로 나누어 총 공기가 73년에 달한다. 

    3북방호림의 이런 숫자는 조금 딲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학교를 다닌적이 없는 57세의 산시(陝西)농민은 20여년의 시간을 들여 비뚤비뚤하게 자기와 3북방호림과 관련되는 숫자를 썼다. 

    우옥금(牛玉琴)은 어려서부터 모우수사토(毛烏素沙地) 남쪽변두리의 모래둥지에서 살았다. 대대로 황사의 고배를 마셔 그의 유일한 소원은 모우수사토를 녹색정원으로 변화시키는것이었다. 

    1984년말, 그와 남편 장가왕(張家旺)은 우선 촌북쪽의 만무 황사를 도급맡고 ‘5년정비계획’을 제정했다. 열악한 자연조건아래서 반복적인 정비를 거쳐 1987년 나무와 풀을 6600무나 심는 계획을 실현했다.  

    황사에 신록이 짙어갈때 장가왕은 과로로 골수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연로한 쌍친과 어린 자식들, 자금부족 등 많은 곤난앞에서 그는 의연히 생명과 사막정비 두가지 중임을 떠맡았다.이는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그가 쓴 이 비뚤비뚤한 숫자를 보면 20여년간 그가 겪은 간난신고를 알수있다.  백양나무 300무, 버드나무 240무,자주버들 1900무, 쑥 2400무, 싸다왕(沙打旺) 1400무,닝티오우(檸條) 650무, 싸미(沙米),싸첸(沙芡) 도합 1800무…

    은행대출: 200여만원 누계투입: 800여만원 

    현재, 이런 숫자는 이미 만리사토변의 동서길이 1.5킬로미터, 남북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초녹주(林草綠洲)로 변했다. 

    우옥금의 숫자는 3북방호림, 이 건강하게 자라는 푸른 나무들에 편입되어 녹색장벽이 4000여킬로미터나 이어졌으며 누계로 2600만헥타르에 달했다.  

    그러나 역사의 빚이 너무 많아 3북방호림프로젝트는 아직 공방단계에 처해 중국북방생태정황은 여전히 우려된다.  

    2000년봄, 서북, 화북지역에 연속 12차례의 황사와 모래폭풍날씨가 발생했다. 

    50년 보기드문 풍사는 매 중국인의 마음을 흔들었다. 

    환경을 관심하는 학자들은 만약 효과적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북방의 풍사는 베이징성을 위협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파상고원(壩上高原)의 유동사구는 베이징에서 직선거리가 200킬로미터도 안된다.

    사막의 남침을 막고 수도주변의 생태환경을 개선하여 수도에 푸른 하늘을 돌려주기 위해 2005년6월, 국가에서는 경진풍사원천정비프로젝트를 긴급 가동했다.     

    경진풍사원천정비프로젝트는 10년간 베이징, 톈진, 허베이, 산시(山西)와 내몽골의 5개성, 직할시, 자치구의 75개현에서 1억여무 모래땅을 정비하기로 했다. 근복적으로 경진지역을 위협하는 풍사를 억제시킨다는 목적이었다. 

    삼림을 보호하는 동시에 우리는 삼림을 서식지로 하는 야생동식물을 잊지 않았다. 현재, 자연보호구건설프로젝트 및 야생동식물보호프로젝트도 제때에 가동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실시범위는 전국의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자연생태계통, 희귀멸종위기종 야생동식물의 천연분포구, 생태환경취약지역 등이 포괄된다.  

    10년간, 200개 전형삼림, 습지와 황막한 생태계통유형자연보호구를 건설하고 또한 15개 야생동식물보호항목으로 국가야생동식물자원유전자은행을 건설하고 야생동식물국가과학연구체계와 관련 감시측정 네트웍을 건설하기로 했다.   

    삼림을 보호해야 되고 국가건설에는 또 목재를 급히 필요했는데 이는 하나의 거대한 모순이었다.  

    경제가 쾌속 발전하는 중국에서 건설에 필요한 대량의 목재를 완전히 수입에만 의존해야 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국가경제와 국민생활의 수요를 해결하고 생태림의 과도한 소모를 억제시키며 국내에 입각해 대량 건설용목재를 재배하며 쾌속생장풍작형목재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길이었다. 

    쾌속생장풍작형목재기지건설프로젝트는 20세기말에 가동했다. 우리나라 400밀리미터 등우량선  동쪽의 18개 성,자치구에 분포되었다. 15년내에 쾌속생장풍작형목재림 1300여만 헥타르를 재배하고 매년 목재 1.3억입방미터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나라 목재 수급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국가에서 지금 실시하고 있는 6대임업중점건설프로젝트의 기획 범위는 중국97%이상의 현을 포괄한다. 이런 임업프로젝트는 섭렵하는 범위가 넓고 투자가 거대하며 영향력이 컸는데 모두 유례없었다. 그중 4개의 프로젝트규모는 모두 구소련의 ‘대자연개조계획’, 미국의 ‘대초원임업프로젝트’와 북아프리카5개국의 ‘녹색댐프로젝트’를 초월해 세계생태프로젝트의 으뜸을 차지했다.이는 중국이 새 세기 아름다운 산천을 재건하는 위대한 장거였고 중국임업을 새로운 발전시기에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좋은 정세의 박수갈채속에서 우리는 명석하게 현실을 보아냈다.  현재 우리는 960만평방킬로미터의 대지에서 인류역사에서 가장 웅대한 경제개발건설을 진행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생태정황이 국부개선, 전반악화의 정황을 근본적으로 되돌리기 어렵다. 

    엥겔스가 말한것 처럼 “우리는 자연계에 대한 승리에 과분하게 도취되지 말아야 한다. 매번의 이러한 승리에 대해 자연계는 모두 우리에게 보복했다.”

    경제의 쾌속 성장은 목재자원의 소모와 재건의 불균형을 조성했다. 불균형한 삼림생태공간은 역으로 또한 진일보로 중국인의 생존공간을 밀어냈다.  

    더욱이 중국은 원래부터 삼림자원이 결핍한 나라였다. 전국제6차삼림자원실사에 따르면 중국의 삼림율은 세계평균수준의 61.25%에 불과했으며 그리고 인구당 삼림면적은 세계평균수준의 25%에 불과했으며 인구당 삼림저축량은 세계평균수준의 33%에도 못 미쳤다. 

    현재, 중국목재안전문제는 이미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우리 매사람의 앞에 출현했다. 미래의 중화대지에 녹색이 넘치기 위해, 우리의 후세에 맑고 깨끗한 환경을 남겨주기 위해, 아름다운 산천의 신주대지를 재건하기 위해, 우리 이 세대 사람들은 더욱 많은 간거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호금도(胡錦濤)를 총서기로 하는 중앙영도집단은 정세를 자세히 살펴 임업을 발전시키고 생태건설사업강화를 지속가능한 발전의 전략고도에 높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 및 환경친선형사회를 건설하려는 웅대한 목표를 제출했다.     

    2003년6월25일, 중공중앙, 국무원에서는 ‘임업발전을 다그칠데 관한 결정 ’을 발부했다. 결정은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에서 임업을 중요한 지위에 놓고 생태건설에서 임업을 첫째지위에 놓으며 서부대개발에서 임업을 기초지위에 놓는다고 지적했다. 

    이’결정’은 당면 및 금후 한시기의 우리나라 임업발전을 지도하는 강령성문건이다. 중국생태건설사업을 위해 방향을 제시했다.    

    중국임업사업의 번영발전에 따라 일부 심층 차원의 체제개혁도 제기되었다. 2003년, 산림소유권제도개혁이 푸젠,장시 등성에서 가동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이 개혁은 이미 중국전역에 확장되었다. 

    21세기의 이번 산림소유권개혁은 주로 다년간 해결하지 못했던 소유권문제를 해결했다.

    '산을 국민들에게 돌려주고 이익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며 소유권을 국민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개혁의 주요목적이었다.   

    우이산(武夷山)남쪽비탈의 춘터우(村頭)마을에 새로 세운 석비가 있다. 이 고장의 관례에 따르면 마을에 대사가 있을때면 돌에다 세겨 기념을 남긴다. 석비에 세긴것은 바로 본 마을의 대사인 산림소유권개혁의 마을규정이다. 농민들은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산림소유권개혁규정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2004년9월, 장시성 집체 산림소유권개혁이 상완마을(上完村)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번 산림소유권개혁은 집체에서 통일적으로 경영하던 산림을 가가호호에 나누어주어 경작지처럼 가정도급경영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촌민 소전위(肖前衛)는 산림소유권증을 발급받았다. 이 증서는 한 뙈기의 녹산을 자기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임지를 소유한 농민들은 자기를 위해, 또한 나라를 위해 녹색의 푸른 산을 관리했다. 수많은 이런 관리자들은 알심들여 억만뙈기의 녹색을 관리해 나갔다. 게다가 이 책임을 부자간에 전수하고 자손대대로 이어나가야만 조국의 푸른 천하를 지켜갈수 있고 중화대지의 영원한 녹색을 지켜갈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몇년간의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중국임업정세는 심각한 변화가 발생했다. 사회가 임업에 대한 수요는 지난날의 목재공급에서 생태수호로 전화되었다. 생활수준이 부단히 높아지는 국민들은 생활환경녹화에 대해 간절한 요구가 있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생태건설에 더욱 많은 중시를 돌리고 투입을 대폭 증가했다. 

    2007년3월, 전국녹화위원회는 ‘2006년중국국토녹화정황공보’를 공포했다.전국삼림면적은 26.2억무에 달했다. 도시녹화율은 32.54%에 달해 인구당 공공녹지면적은 7.89제곱미터에 달했다. 농촌녹화사업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농촌환경원림화,농촌정원꽃과 과일화,도로수로 가로수화를 초보적으로 실현했다.     

    임업산업발전은 강력했다. 2006년, 전국임업총생산액은 9000억위안을 초과했다. 특히 사람을 기쁘게 하는것은 우리나라 삼림문화, 생태관광문화가 번영발전한 것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이미 각급 삼림공원 1928개를 건설했다. 2006년, 2억명이 삼림공원을 관광해 생산액 1000억위안을 실현했다.  

    현재, 창장중하류의 고산원야사이에, 황허유역의 계곡, 가파른 산비탈에 많은 푸른 초목이 생겨났다.   이런 화려하고 멋진 색깔은 바로 우리가 만리국토사이에 그려가는 화폭으로 생태문명시대의 장려한 경치이다.

    2010년, 우리나라의 삼림율은 19.4%에 달해 생태환경악화의 추세가 초보적으로 억제되었다. 

    2030년, 삼림율은 24%에 달해 생태환경이 뚜렷이 개선된다. 

    2050년, 삼림율은 26%이상을 유지해 분포가 합리하고 기능이 구전하며 관리가 효율적인 임업생태체계를 건설하며 규범이 질서정연하고 집약 경영하며 활력이 넘치는 임업산업체계를 건설한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생태면모를 개변시키는 것이다. 

    과학발전관을 낙착하여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발전을 실현하는 것은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기본담보이고 필요한 조건이다. 발달한 임업은 이미 아름다운 생태로 되었다. 국가가 부유하고 민족이 번영하는 것은 사회진보의 중요한 상징이다.   

    그렇다, 우리의 어깨위의 사명은 위대하고 또한 간거하다. 아름다운 산천을 재건하는 장거는 우리가 착실하게 하나하나 실현해 나가야 한다.   

    천만년간, 삼림은 가슴을 열고 우리가 마음대로 취사하게 했다. 지금은 우리가 마땅히 보답해야 할때이다.  

    하나의 봄날에 봄날을 이어 26개의 봄이 지나갔다.그때 나무를 심었던 노인은 이미 조용히 우리곁을  떠났다. 그러나 옥천산위의 이 소나무는 어엿한 큰 나무로 자라났다. 그는 흡사 노인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대지를 수호하는 신성한 직책을 떠맡기 시작했다.

    눈을 들어 먼곳을 바라보면 우리는 광활한 조국대지에 온 산야에 가득한 작은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한세대 또 한세대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중화민족은 반드시 녹색이 넘치는 세상,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될것이다! 

    문자편집: 진종호

책임 편집:刘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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